책보고

사랑의 작은 책자 - 김윤희

최사막 2023. 5. 25. 12:26

 

한 독립 서점을 찾고 있었다. 그 서점에 가는 길을 안내 받다가 다른 서점을 만나게 됐다.

그렇게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만난 보물 같은 책. 

 

사랑의 작은 책자 - 김윤희

 

각 챕터가 짧고 문장이 쓱쓱 읽혀서 쉽게 읽을 수 있다. 

15명 정도의 캐릭터가 나오는 데 다 개성이 강하다. 마냥 착하고 순한 캐릭터가 없어서 좋았다. 

동화 같은 설정인데 억지로 도덕성이나 교훈을 강조하지 않는 것도.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루따와 미오는 기구한 운명을 갖고 태어났지만,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동정심이 생길 틈도 없이 영리하거나 얍삽하거나 씩씩하거나 무모하기 때문이다.

 

헛간의 구멍 난 지붕 덕에 루따는 밤하늘의 별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빗방울 그리고 눈송이와도 한 식구처럼 지낼 수가 있었다. 얼마나 낡았는지 밤에 바람이라도 세게 불라치면, 헛간의 지붕은 흔들흔들 불길하게 춤을 추다가 폭삭 주저앉는 게 아닐까 싶어 루따는 불안해서 잠도 못 잘 정도였다. 하지만 헛간은 용케도 무너지지 않고 루따의 집이 되어주었다. 루따는 출근하러 헛간을 나설 때마다 중얼거렸다. '나 없을 때는 좀 무너져도 좋으련만.'

 

이 책에 등장하는 '파랑새(하이사)'는 희망이나 행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는 기분을 좋아하는, '도파민 중독'인 정령이다.

사람들이 추앙하며 애타게 기다리는 린들 여신은 사실 여신도 아니고 아무 능력도 없는 하이사의 꼭두각시다.

단지 사람들이 황홀하게 빠져드는 외모를 가졌고, 본인도 외모지상주의자에 요즘 말로 남미새일 뿐. 

 

자식보다 자신의 부귀영화에 취해 있는 소피와 트티(특히 트티는 자식을 죽이기까지 한다). 

헌금을 많이 낸 순으로 앞자리부터 앉히는 위선적인 제마야 신부

자식을 낳기 위해 30번째 왕비를 찾는 오더러 왕

땅 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오더러 왕의 동생 콜 공작

 

옛 동화에서라면 지독한 괴롭힘으로 스트레스를 줄 법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정도이다. 오히려 재산과 권력, 지위를 잃게 될까 봐, 혹은 더 많은 것을 얻고 싶어서 계속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게 불쌍했다. 

 

정이 가는 캐릭터는 멜리나 왕비와 애나였다. 서민으로 살던 열여섯 살의 멜리나는 느닷없이 환갑이 넘은 왕과 강제 결혼을 하게 된다. 귀족 생활에 적응하지 못 해 왕실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그녀의 도피처는 하녀 애나가 읽어주는 '작은 책자'. 지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사랑 이야기들은 멜리나의 꿈이자 희망이 된다. 

 

개인적으로 루따와 미오의 로맨스보다 멜리나와 애나의 워맨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가장 따뜻했던 장면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가지도,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리파리를 살린 올가 부인의 요리와 커피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는데 리파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도마에 칼로 무언가를 써는 소리, 냄비를 여는 소리, 보글보글 국물이 끓는 소리,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 

그 소리들이 차갑게 식어가던 집을 따뜻하게 살려내고 있었다. 

 

미오와 루따의 대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