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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옌 중단편선

최사막 2023. 7. 31. 23:42

중국 작가 모옌의 중편 1편과 단편 11편이 들어있다. 

이 선집에 있는 작품들은 대체로 '기-스으응-저어어어어어어언-결!' 요런 느낌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건데'하고 궁금증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 갑자기 '끝'이란다.

읽고 나면 찝찝하거나 기괴하거나 가엽거나 신비로운 꿈을 꾸다가 깬 것 같다. 

 

모옌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 

줄거리는 충격적이고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감각과 장면들이다. 

 

인상이 남았던 시각적 묘사: 

태양이 솟아올라 강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물을 긷는 남자들이 다리 중앙에 서서 다리를 쩍 벌리고 허리를 구부린 채 맑은 강물이 가득 담긴 물통을 끌어 올렸다. 수많은 영롱한 물방울들이 물통 가장자리를 따라 소리 없이 강으로 떨어졌다. 윤기가 번지르르한 검은 개 한 마리가 강둑을 어슬렁어슬렁 걸어가고, 수탉 한 마리가 풀 더미 위에서 멍하니 서 있고, 희뿌연 밥 짓는 연기가 집집마다 굴뚝을 통해 곧장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다. 이것이 바로 새벽 풍경이다. (첫사랑) 

 

 

 

영아 유기

 

줄거리: 

   화자는 해바라기 들판에서 버려진 갓난 여자 아기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집에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부모님과 아내, 남동생을 기다리는 딸이 있다. 이 시대, 이 배경에서 영아, 특히 여자아이의 유기는 비일비재했다. 아이를 기를 사람을 찾기 위해 향(정부 기관)에도 가보고, 동네 사람들에게 말해보고,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고모에게도 가보지만 이 아이를 맡아서 길러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자는 먹고 싸기만 하는 아이를 증오하다가(나는 왜 이 아이를 구했을까? 아이가 분노의 목청으로 내게 힐문했다. 왜 날 구했어요? 내가 고마워하기라도 할 것 같아요?) 아이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생각을 고친다. 

 

   해바라기처럼 휘황찬란하고 열정적인 생명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황금빛 해바라기 꽃밭을 떠올렸고, 내 불경한 생각들을 부정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껏 사람에게 애정을 줘야지.... 증오하면서도 사랑해야지...

 

   아이를 처음 발견한 해바라기 들판으로 간 화자는 교배하는 메뚜기 한 쌍을 보며, 메뚜기들은 인간에 비해 전혀 비천하지 않은 존재이며, 인류 역시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그리고 어쨌거나 해바라기 들판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의료 기관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아 유기 문제, 그 뿌리가 되는 사상을 바꾸어 놓을 묘책은 누가 갖고 있냐고 질문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감상: 

   작가의 장편소설 <개구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개구리> 역시 영아 유기에 관한 내용이고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고모가 등장하기도 하고, 중간중간 드러나는 메시지도 겹친다. <백구와 그네>라는 모옌의 실제 작품도 언급되고 화자가 소설가이기 때문에 <영아 유기>의 화자가 곧 모옌이라고 생각된다.  

   과거 만연했던 영아 유기를 직접 보고 겪은 모옌은 인간과 정부의 잔인함과 악함, 위선, 비인간적인 모습, 갓 태어난 인간의 먹는 욕구와 싸는 욕구, 이기심, 곤충만도 나을 바가 없는 존재... 이런 걸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 주는 해바라기가 있다면 기어코 위안을 얻고 활력을 회복하는 게 사람이며, 사람은 사람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 제목이랑 안 어울리게 '사랑'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지옥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장면: 향 정부에 간 화자가 난데없이 개에게 다리를 물린다. 그때 화자의 깨달음. 

   이 녀석이야말로 위대한 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나를 왜 물었지?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물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무조건적인 사랑도, 아무 이유 없는 미움도 없다. 개는 아마도 나에게 고통 속에서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진짜 위험은 전방이 아닌 후방에서 온다는 것을, 진짜 위험은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짓는 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모나리자처럼 달콤한 미소를 짓는 자에게서 온다는 것을 말이다

 

 

철의 아이

줄거리: 

   중국 정부가 철강 제련에 모든 걸 걸었던 시절, 철로 작업을 하는 부모를 둔 아이가 주인공이다. 아이는 4~5살로, 작업자들의 자녀를 공동 육아하는 시설에서 생활한다. 초가집에서 할머니 세 명이 끓여주는 채소죽으로 하루 세 끼 배를 채운다. 유아원을 둘러싼 울타리에 매달려 가족을 찾아보지만 만나지 못한다. 마침내 철로가 완성되고 유아원의 아이들은 모두 가족들과 재회하지만 주인공은 부모를 찾지 못한다. 

   주인공은 녹슨 철 같이 생긴 '철의 아이'를 만난다. 철의 아이는 주인공을 '나무'라고 부르며 철을 먹는 법을 알려준다. 주인공은 철을 먹었고 먹을수록 맛을 느꼈다. 철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철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고, 철을 먹어서 배가 불렀기 때문에 이제 부모를 그리워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철의 아이는 철강 더미에서 만두와 고구마를 먹는 사람들과 주인공의 부모를 만난다. 주인공은 만두와 고구마에서 악취가 난다며 부모에게서 도망친다. 솥도 먹고 기차의 바퀴도 먹으며 소란을 피우던 주인공과 철의 아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잡힌다. 주인공은 사포질을 당하며 몸에 슨 녹이 떨어지자 고통을 느낀다. 

 

감상: 

   한때 중국 정부는 철강에 과몰입했고 사람들은 제련에 세뇌되었다고 한다. 농사, 교육, 살림... 다 멈춘 채 용광로만 오갔단다. 

   모옌은 차라리 철을 먹고 싶었나 보다. 고구마랑 고기만두에서 악취를 느낄 정도로 철을 맛있고 배부르게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메뚜기 괴담

줄거리: 

   가뭄으로 척박해진 땅에서 새끼 메뚜기 떼가 나왔다. 들판은 더 황량해졌고 풀이란 풀은 다 갉아 먹혔다.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렸던 비가 내렸다. 그러나 비가 온 후 메뚜기들은 크기가 더 자랐다. 빗물을 머금은 대지에서 새롭게 자란 생명은 모두 메뚜기 떼의 성찬이 되었다. 그러자 식물들이 화가 나서 스스로 성장을 멈췄고, 메뚜리 떼는 초조하고 불안해 했다. 메뚜기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강을 건너 다른 마을로 사라졌다. 

   다시 대지에서 새싹이 자랐고 가을 수확을 한, 두 달 앞두고 있었다. 갑자기 붉은 구름과 함께 메뚜기 떼가 돌아왔다. 몇 달 동안만에 나타난 메뚜기 떼는 더욱 강해져 있었다. 성충 메뚜기를 보니 새끼 메뚜기들이 차라리 착했다고 느껴졌다.

   사람들은 끝이 없는 것 같은 메뚜기들과 대전을 치르기로 한다.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자 메뚜기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건초를 더해 불길을 키웠다. 건초를 모두 태우자 나무를 던졌고, 나무가 다 떨어지자 집의 문짝을 떼어 냈다. 메뚜기와의 전쟁을 위해 우리 선조들은 모든 것을 내놓았다. 우리는 팔랍의 선한 마음을 기원하지도, 유맹에게 신의 위력을 기원하지도 않았다. 백성의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의존했다. 

 

 

감상: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위화는 중국에서 '풀뿌리'란 일반 대중을 의미한다고 했다.

   '메뚜기 괴담'에서도 식물과 풀은 서민을 상징한다. 이미 가뭄으로 굶주린 풀(서민)을 습격하는 메뚜기 떼는 관료들이다. 처음에 나타난 새끼 메뚜기는 하급 관료, 혹은 기존 정권을 의미하고 성충 메뚜기는 성충 관료, 혹은 더 악랄해진 정권인 것으로 생각된다. 

   

   메뚜기 떼의 습격 장면은 공포스럽고 먹먹하고 답답했다. 특히 예전에 새끼 메뚜기 떼한테 호되게 당했으면서 성충 메뚜기 떼를 만나고 차라리 예전이 나았다고 말하는 장면은 처연한 과거 미화로 보였다. 

 

  미신에 기대도 소용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모든 것을 걸고 직접 싸워야만 했다.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중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 챕터가 생각났다. 씁쓸하다 씁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