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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의 시대 - 이서수

최사막 2023. 10. 28. 00:14

여러 번의 이직과 퇴사 끝에 무직 상태인 미조는 엄마랑 살고 있는 셋방에서 나가야 한다.

집주인에게서 방 빼라는 말을 들은 날, 미조의 엄마는 이런 시 구절을 썼다.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같은 하루. 

 

어쩐지 개떡 같은 하루보다 더 개떡 같은 하루처럼 들린다. 

 

수중의 돈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5천만 원. 서울에서 5천만 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머리가 차일 것 같고, 냄새만으로 옆집 반찬이 감자조림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는 반지하 방.

 

미조는 엄마가 키우는,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자란 고구마 줄기를 보았다.

 

안 그래도 짐이 많은데, 원룸에 이 짐을 다 넣을 수는 없을 텐데 고구마 줄기는... 자라며 내게 자기 방을 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조용한 식물까지 미워하는 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작아진 걸까. 6평짜리 반지하 방만큼? 

 

그리고 일기를 쓴다.

 

고구마 줄기. 써놓고 보니, 무해한 단어였다. 차분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종이에 있는 단어도 이렇듯 자리가 있는데 우리는 왜 아무 곳에도 앉지 못할까.

 

 

미조! 어차피 당장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꼭 서울에서 살아야 해?

면접 본 회사에서도 10년 동안 월급이 비슷할 것 같던데, 한번 다른 지역에서 일을 찾아봐. 아까 거기보단 나은 집에 살 수 있을 텐데. 

 

말해주고 싶었다.

 

 

미조가 친하게 지내는 수영 언니는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IT 회사에서 성인 웹툰을 그린다. 

얼마나 대단한(?) 내용과 묘사인지, 수영은 이 일을 하면서 바로 탈모가 생겼고, 손목, 목, 허리 디스크가 생기기 직전이며, 퇴근 후 물가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게 루틴이다. 

 

어느 날, 옛 구로 공단에서 가발을 만드는 여자의 사진을 본 수영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저 여자처럼 시대가 요구하는 걸 만들고 있는 거야. 시대가 가발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가발을 만드는 거고, 시대가 성인 웹툰을 만들어야 돈을 주겠다고 하면 그걸 만드는 거야.

사람들이 좋은 웹툰보다 나쁜 웹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이 시대가 내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고 있어. 

 

 

처음에는 처연하게 들렸던 이 말에, 반박하고 싶어졌다.

 

가발 공장의 여성은 가발이 지긋지긋하고 꼴 보기 싫었을 수는 있지만, 트라우마로 꽂히진 않았을 거다. 

성인 웹툰, 특히 수위가 아주 높은 것으로 보이는 수영 언니의 웹툰 장면과 가발을 만드는 일은 정신적으로 받는 충격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다. 

 

성인 웹툰을 그저 '하나의 일감'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수영은 살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일을 관둬야 한다. 그림도 잘 그린다고 했으니 분명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아무튼 거긴 아니다. 

 

아무튼...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