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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고

사랑의 생애 - 이승우

by 최사막 2023. 8. 1.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랑 제목이 바뀐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왜나너사>는 사랑의 시작과 끝,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고, <사랑의 생애>는 왜(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왜 '나'이고 왜 '너'인지, 사랑은 왜 '하는'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어서다. 

 

   두 책에 비슷한 부분이 있다. 

첫째,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미지의 대상이며, 모르고 낯선 사람이 주는 불편함과 긴장감이 곧 호기심과 관심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둘째,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다니'라고 생각하는, 자존감 낮고 열등감이 큰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준다. 

 

 

   <왜나너사>를 읽을 땐 주인공의 경험을 보고 '나도 그랬는데'하고 공감했다면, 

   <사랑의 생애>를 읽을 때는 작가의 해석을 보며 '그럴 수도 있구나,' '이래서 그랬던 거구나'하고 이해하게 됐다. 

 

 

   <사랑의 생애>는 사랑이 불완전하고 모순된 인간을 숙주를 선택해서 벌어지는 일을, 여러 숙주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랑은 덮친다. 덮치는 것이 사건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자는 자기 속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물론 허락을 구하지 않고) 어떤 사람, 즉 사랑을 속수무책으로 겪어야 한다. 

 

주요 숙주는 네 명이다. 여자는 한 명, 남자는 세 명이다. 

   형배 - 어릴 적 어머니와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로 인해 사랑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남자. 2년 10개월 전 연인처럼 지냈던 선희의 고백을 거절했다. 그리고 우연히 다시 만난 선희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영석 - 고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사랑을 달라고 구한 경험이 없는 남자. 약함이 무기이지만, 약함이 유인하는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무기를 쓸 줄 모르는 사람.

   준호 - 형배의 동기.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은 신화일 뿐이며,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사랑이 왜곡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는 바람둥이. 

 

   나는 여자 주인공인 선희에게서 찐 사랑을 느꼈다.

   선희는 어둡고 좁아진 숲에서 쓰러진 영석이 깨어났을 때부터, 그 '약한' 영석을 대상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집착하는 영석의 엄마가 되어 토닥여주고, 화를 내며 질투하는 영석을 이해하고 이해시키려고 하는 선희의 사랑은 찐이다. 영석이 넝쿨처럼 그녀를 타고 올라 살아내도록 기꺼이 나무 기둥이 되어준다

   데이트 폭력 아니야? 이러다 선희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는 영석을 보듬고 품는 선희는 영석에게 '구원자'와 같다. 

   물론 영석이 선희에게 백해무익한 존재는 아니다. 선희가 공모전에서 당선되었을 때, 형배를 그리워할 때 선희의 옆에, 앞에 있어 주고 선희가 해달라는 대로 해준 사람은 영석이었다. 선희가 뾰루지를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도 영석이었다. 

   형배도 선희의 사랑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2년 10개월 전에는 사랑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기회를 놓쳤다면, 이번에는 선희를 '나한테 한 번 차였던 여자'로 인식하고 거만하게 행동함으로써 기회를 완전히 잃었다. 

 

   형배의 어머니가, 다른 여자와 바람 난 남편의 종말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돌봐주는 모습은 정말 바보 같은데, 그 남자가 유일한 사랑이라는 걸 어떻게 해. 사랑이 형배의 어머니라는 숙주한테는 형배의 아버지에 대해서만 찾아온 걸 어떻게 해. 

 

   <사랑의 생애>는 사람이 사랑이라는 기적 혹은 꿈 혹은 마법에 '수동적으로' 빠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느라 바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도 정의되지 않는 것이 신이고 삶이고 사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