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사진작가 제프 다이어가 사진을 읽어준다. 사진의 캡션만 보고는 알 수 없는 정보, 숨겨진 이야기, 촬영된 당시의 시대 상황, 작가의 성격 등을 알려준다. 사진 한 장을 해석하면서 깊은 사유와 철학적 사고를 하거나 아쉬운 부분을 터놓기도 한다. 사진 문외한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가장 여운이 남는 건 PART ONE <만남들> 마지막에 나오는 클로이 듀이 매슈스의 '새벽의 총성' 시리즈. 배경 지식 없이 보면 사진은 그저 쓸쓸하고 차갑고 고요한 새벽에 나무, 들판, 벽, 배수로, 철조망, 둑, 수풀을 찍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장소들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병사들이 처형된 곳이다. 들판 아래에는 매장된 망자가 있다. 강은 훼손된 시신이 버려졌던 곳이다. 제프 다이어는 이 사진들이 '마치 시체를 공들여 제거한 것처럼 보이게' 우리 인식을 바꿔놓는다고 말한다.
짧은 노출의 결과인 이미지는 때때로 개인의 삶이 멈춘 순간부터 그 풍경을 에워싸는 참사의 오랜 여파를 통과해 망각에 젖어 있거나 그렇지 않은 현재까지 이르는,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간을 포함하고 있다.
배경을 알게 된 후 사진을 다시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 책에는 두 장만 실렸지만 인터넷에서 다른 사진들도 볼 수 있다.
제프 다이어가 자신을 '구식 중년 남자'라고 고백하는 [집에 머무는 거리 사진작가들: 마이클 울프, 존 라프만, 더그 리카드] 편에 나오는 사진(사진이라고 한다면)들은 기발하면서도 여러 의문이 생긴다. 바로 '구글 스트리트뷰'에서 캡처한 순간을 찍은 사진들이다. 우선 사생활 침해나 초상권 문제가 떠오르고, 현장을 직접 가보지도 않고 자동차가 찍은 지도 화면을 캡처하거나 스캔하는 것도 사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나. 제프 다이어는 처음엔 회의적이었으나 리카드의 '새로운 미국의 사진' 전시에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난 여전히 찝찝하지만.
그리고 반전이라고 할까, 흥미로운 미스터리가 있다. 일라이 와인버그가 찍은 '반역죄 재판 첫날 드릴 홀 주변의 군중'에서 흑인 여성들 사이에 꼽사리처럼 서 있는 백인 소년의 정체다. 제프 다이어는 이 소년의 옷차림과 자세, 표정, 흑인 여성들이 들고 있는 피켓, 시위 장소를 단서로 소년의 신원을 추측한다. 오랜 추적 끝에 찾아낸 소년의 정체는...?
이 책에서 배운 용어 '침핑(Chimping)' -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습관적으로 바로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삭제하는 일.
누구나 침핑하고 가공, 보정할 수 있고, 심지어 딥페이크까지 우려해야 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시대를 기록하는 사진의 의미, 피사체에 대한 존중, 찍는 사람의 의도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 내가 읽은 건 2022년 11월에 발행된 3쇄인데, 초반부터 같은 단어나 구절이 반복 인쇄된 오류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매끄럽게 읽히는 번역인데 교열 오류가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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