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탐험가 알랭 제르보의 모험기.
한국어 제목을 보면 폴리네시아 여행기 같지만, 전반부만 폴리네시아와 관련된 내용이고 후반부는 인도양을 거쳐 프랑스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전체 내용을 읽고 나면 '피레크레의 수난기'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피레크레는 알랭이 탄 배의 이름 'Firecrest'의 프랑스식 발음이다. 이 배가 처음부터 끝까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알랭이 잠든 사이에 산호초에 걸려 있거나, 비스듬히 해안에 자빠져 있거나, 암초에 수도 없이 부딪힌다. 배의 부품들은 툭하면 사라지는데 원주민들한테 부품을 구할 수도 없어 다른 배가 섬에 오길 마냥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피레크레는 이런 항해용으로 쓰기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다. 부엌, 사물함, 소파, 책상, 사물함, 화장실, 붙박이장, 그리고 서재!!! 알랭 제르보는 다독가였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가져온 책도 있고 섬에서 책을 구하기도 한다. 사모아에서는 이 섬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던 '보물섬'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책을 얻는다.
다독가인 동시에 이미 꽤 유명한 탐험가 겸 작가였던 그는 험난한 여정 중에도 일기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단한 사람이다.
알랭은 정박한 뒤에 주로 배를 수리하고, 원주민이나 거주민(유럽인 아니면 미국인)과 테니스를 치고, 원주민과 거주민들에게 식사 초대도 자주 받는다.
알랭이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원주민들에게 경계심을 일으키지만, 알랭은 적극적으로 유럽식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사람이었고 결국엔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가 되어 떠날 때는 배를 가득 채울 만큼 선물을 받기도 한다.
알랭이 받은 선물 중에는 금강잉꼬, 위스티티 원숭이, 사향고양이도 있다.
타히티섬의 한 원주민은 그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다른 유럽인들과 달랐어요. 항상 자기 배 갑판에서 책을 읽곤 했죠. 애들은 거기 올라가 마음대로 뛰놀고 바다로 뛰어들곤 했어요. 그래도 그는 꼼짝 않고 책만 읽었어요. 하지만 유럽 사람이 나타나는 모습만 보여도 자리를 떠버렸죠.”
하지만 어떤 원주민은 알랭이 거만하고 냉정하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실제로 알랭은 자기 배에 다른 사람이 함부로 올라오는 게 싫어서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했다.
그래도 그가 프랑스에 돌아가기를 싫어하고 폴리네시아를 떠날 때 무척 슬퍼한 것은 사실이다. 청소년기에 집안의 파산으로 우울증까지 앓았던 알랭은 돈으로 거래하지 않고 부에 관심 없는 원주민들이 사는 폴리네시아가 일종의 도피처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폴리네시아에서 꿈꾸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도 어느 날 아무도 살지 않는 환초의 주인이 되어, 내가 고른 폴리네시아 주민들을 끌어들이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돈은 쓰지 않고, 운동을 하고 예술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내가 고른 폴리네시아 주민들'이란 말은 많이 거슬린다. 알랭은 섬에 도착하면 원주민들의 외모, 특히 피부색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원주민과 백인, 유색인을 구분 짓는다. 애초에 폴리네시아 섬 대부분이 프랑스, 영국, 미국령이었기 때문에 이런 여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낯선 곳이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니까.
원주민들의 '무소유지만 행복한' 태도를 동경하고 섬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유럽식 식민지에 반대하면서도, 그들과 나를 확실히 구분하면서 그들을 낮게 나를 높게 생각하기 때문에 원주민을 고를 수 있다고 말한 거겠지. 찝찝한 기분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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