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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게이하트 - 윌라 캐더

by 최사막 2024. 6. 9.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이런 문장이 있다.

새로이 열린 세계에 대한 한스의 숭배는 친구를 향한 경탄과 더불어 하나의 감정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루시 게이하트>에도 적용되는 문장이다.

새로이 열린 세계에 대한 루시의 숭배는 서배스천을 향한 경탄과 더불어 하나의 감정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동차가 보편화되지 않아 마차를 타던 시절에 시작된다. 

 

소박한 마을, 넉넉한 편은 아닌 가정에서 자란 루시가 새로운 세상, 무척이나 근사하고 화려하고 풍요로운 시카고라는 도시를 만났다. 비록 좁은 단칸방에 머물고 있지만 매일 시카고의 길을 걷고, 시카고의 공기를 마시고, 시카고의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열린 또 다른 신세계. 

 

루시는 한 공연에서 성악가 서배스천을 보게 되고 그를 동경하게 된다. 우주의 힘은 그녀를 서배스천에게로 이끌었다. 음악 선생님의 소개로 서배스천의 연습 반주자가 된 것이다. 

 

아름다운 목소리, 풍부한 경험, 해박한 음악 지식, 어른스러움, 경제적 여유, 정중하면서도 다정한 태도. 

루시에게 서배스천은 이제껏 경험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남성이다.  

 

루시의 마음에 닿은 것은 새로운 개념의 예술일까? 그보다는 내밀했다. 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매력? 그 이상이었다.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했다. 

 

온 동네 사람의 예쁨을 받을 정도로 싱그러운 외모와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인 루시는 날마다 화려한 무대에 오르고 고독한 방으로 내려오는, 기혼자이지만 아내와는 떨어져 사는 서배스천에게도 청춘의 설렘을 주는 존재가 된다. 

 

루시와 서배스천은 환경적/문화적/사회적 이유로 자의 반 타의 반 플라토닉 러브를 한 것으로 보인다. 

 

시카고에서 큰 꿈을 꾸고 서배스천에게 푹 빠진 루시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네가 다 아는 썸 타는 사이, 은행장의 아들, 부유한 집안의 야심 찬 자제 해리 고든이 유치하게 느껴지고 부족해 보이고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시카고까지 찾아온 해리의 청혼을 거절한다. 

 

하지만, 서배스천은 해외 투어 일정으로 시카고에서의 삶을 정리해야 했다. 루시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서배스천의 진심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 루시에게 가는 것이었다. 

 

콘서트와 호텔, 목퍼드, 아내, 프랑스의 집, 영국의 친구들, 그의 정체성과 소유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그의 앞에 펼쳐진 미래에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이 젊음과 헌신이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지금 그의 가슴에 맞닿아 있는 감정은 오직 오늘 밤에만 유효했다. 

 

그러나 투어를 떠나기로 결정한 서배스천, 그리고 이어지는 비극 1부, 2부, 3부... 허무할 정도로 비극이 잇따른다.  

소설은 3부에서 해리 고든이 루시 게이하트를 기억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신선함과 진부함이 반반인 결말.

 

이야기는 안타깝지만, '서배스천이 투어를 떠나지 않았다면 모든 게 달라지지 않았을까'하고 가정하고 싶지 않은 건, '젊음과 헌신이 전과 같지 않으리라'던 서배스천의 생각과 비슷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