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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고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 윌라 캐더

by 최사막 2024. 7. 4.

 

19세기 말, 프랑스 출신의 장 라투르 주교와 요셉 바오로 신부가 뉴멕시코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현지의 멕시코인, 인디언, 여러 사제를 만나는 에피소드들. 

 

윌라 캐더가 엄청난 상상력을 가진 수다스러운 이야기꾼이라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다. 잠깐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징 묘사도 놓치지 않아서 어떤 인물인지 금방 예측할 수 있다. 

 

오지를 품은 선교사라고 해서 됨됨이가 바르거나 훌륭한 사람인 것이 아니며 누구나 결함 많은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소설이다. 춤을 좋아하고 여신도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제,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면서 인디언의 미신을 믿는 사제, 권력에 맛을 들여 신도들을 지배하는 사제, 등등. 

 

그러나 부족함 투성이임에도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설고 거친 땅에 생애를 바친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도 잊지 않고 있다. 

 

초창기 선교사들은 거인들의 인내심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고 있는 이 지방의 딱딱한 심장 위에 벌거벗은 그들의 몸을 내던진 것이었다. 그들은 사막에서 갈증으로 고생했고, 바위 사이에서 굶주렸으며, 발에 돌투성이로 타박상을 입으며 무시무시하게 험준한 계곡을 오르내렸고, 오래 굶주렸던 배를 깨끗하지도 않고 비위에 맞지도 않는 음식으로 채웠다. 

 

 

주인공인 라투르 주교와 바오로 신부는 자주 의견이 엇갈릴 정도로 성격과 기질이 다른 데, 그럼에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그런데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관계는 길을 안내하는 원주민 하신토와 라투르 주교 사이의 조심스러운 배려와 우정이다. 

 

주교는 하신토에게 그의 생각이나 신념 등에 대해 묻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그게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설혹 그게 가능하다 해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유럽인의 문명에 대한 그 자신의 개념을 이 인디언의 마음속에 전해 줄 수 없고, 하신토가 갖고 있는 오랜 전통과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그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언어가 있을 리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하신토)의 경험에 의하면,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대할 때 늘 거짓 얼굴로 대했다. 거짓 얼굴을 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바일랑 신부는 너무나 지나치게 친절했다. 주교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똑바로 서서 라구나의 성당 관리인에게 몸을 돌렸는데, 얼굴에는 조금도 변한 기미가 없었다. 하신토는 이 점이 주교가 뛰어나게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미국 정부가 뉴멕시코를 개척하던 시기가 배경인 만큼, 원주민에 대한 악행과 무자비한 침해를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생각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멕시코인들이 스포츠처럼 즐기는 '나바호족 사냥'이라든가 

 

죽음을 앞둔 주교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얘야, 내가 두 가지 커다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살았다니 다행이야. 흑인 노예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고, 나바호족이 그들이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살게 되는 것을 보았으니 말이야.”

 

 

주교가 노새를 타고 다니면서 보는 자연과 풍경에 대한 설명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같이 여행 중인 듯한 기분이다. 

 

이 평평한 높은 바위산이 있는 평원은 아주 옛날 고대의 모습, 불완전한 그 어떤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었는데 마치 창조주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모든 재료들을 이곳으로 모아다 놓고 산, 평원, 고원 등으로 배열하기 바로 직전에 그것들을 내버려두고 가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 지역은 마치 어떤 풍경이 되기 위해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쉬운 점은 말투의 번역.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거든요”라고 말하는 등 비슷한 말투를 쓰는 데, 각 화자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