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짧은 소설이고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다 읽으니 긴 여정을 지나온 느낌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주인공 펄롱에게 몰입해서 그런 것 같다.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을 둔 펄롱은 어릴 때 아버지가 안 계셨다. 어머니는 부자인 미시즈 윌슨 집에서 식모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미시즈 윌슨은 펄롱을 아들처럼 사랑해 주었다. 부유한 집에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랐지만 마음속 한 자리에는 늘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과 허전함이 있었다.
혹독한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내와 딸들, 동네 사람들은 그날을 기대하며 분주하게 준비한다. 펄롱은 그 분주함을 따르면서도 늘 순서가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삶 속에서 권태를 느낀다. 멈추고 싶기도, 도망가고 싶기도, 새로운 것을 하고 싶기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오던 때, 일 때문에 찾아간 수녀원에서 학대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소녀를 만난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고, 수녀원과 연계된 학교에 딸들을 입학시켜야 하는 상황이라 그대로 돌아오지만, 마음속에는 불편함이 남아있다.
수녀원에 맞서면 불리한 일뿐이며, 지금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감사할 수 있는 특권 자체가 찝찝하다. 그 찝찝함과 불편함은 미시즈 윌슨이 어머니와 자신에게 베푼 사랑의 경험 때문이다. 누군가의 도움, 친절함, 사랑, 관심이 자기를 살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미시즈 윌슨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수녀원의 소녀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런 펄롱이 용기를 내게 된 순간은 바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된 때다. 비어있었던 마음의 한 구석이 채워지고, 자기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라는 것을 깨닫자, 누군가를 도울 용기가 생기고 결단을 하게 되고 행동을 옮기게 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여러 의미로 해석된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의 고마운 일, 좋은 만남, 웃음, 평화로움은 사실은 사소한 게 아니라 특별한 축복이라는 것. 그리고 별 거 아닌 것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 미소, 부축, 동행에는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담겨있다는 것.
그리고 주목이 됐던 부분은, 소녀를 괴롭힌 사람이 성인 여자들이고 소녀를 도운 사람은 남자인 펄롱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엔 주인공인 펄롱을 제외하고 여자 등장인물이 많다. 성인 여성은 강하고 영민하고 차가운 이미지로, 어린 여성은 연약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펄롱은 아내, 교회와 동네의 여자들, 수녀에게는 두려움, 거북함, 반항심 같은 걸 느끼면서 다섯 딸에게는 보호본능을, 학대당하는 소녀에게는 연민과 동정심을 느낀다. 결국 선행에 성별, 나이, 종교는 상관이 없다. 자신이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부축하고 연대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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