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아 벌린의 단편 소설집 <청소부 매뉴얼>에 있는 작품 중 하나. 어도비 흙먼지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것 같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영화 <비포선라이즈>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여운이 있다.
엘로이즈는 3년 전 남편 멜과 사별한 후 첫 여행으로 멕시코 지와타네호에 왔다. (지와타네호는 영화 <쇼생크탈출>에서 앤디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꿈꿨던 '기억이 없는 따뜻한 곳'이다.)
화려하고 요란한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회색 정장 차림인 모습이, 엘로이즈가 이 휴양지를 즐기려고 온 게 아니라 도피하기 위해 황급히 떠나왔다는 걸 보여준다.
다음 날 아침, 엘로이즈는 새로 산 담홍색 원피스를 입고 산책을 하다 스쿠버다이빙 간판이 있는 라스가타스의 한 마을에 다다른다. 한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오두막에 묵기로 한다. 벽이 없기 때문에 침대에 앉아 바다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사생활 보호가 안 되는 곳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마을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엘로이즈는 족장인 세사르를 만난다. 올메카 조각상처럼 키가 작고 다부진 사람이었다. 짙은 갈색 피부, 눈꺼풀은 두툼하고 입은 관능적이었다.
세사르 역시 2년 전 아내와 사별했고 아들이 둘 있다. 다음 날, 세사르는 엘로이즈에게 잠수 장비를 입혀주고 다이빙 기초를 가르쳐 준다.
“튼튼하시군요.” 세사르가 엘로이즈의 몸을 보며 말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졌다. 튼튼하다.
등에 진 탱크가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그만해요, 난 이걸 지지 못해요.” “할 수 있어요.” 그는 마우스피스를 그녀의 입에 물리고 그녀를 물속으로 이끌었다. 무게감이 사라졌다. 탱크의 무게감뿐 아니라 그녀 자신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잠수 중 엘로이즈가 보조 탱크를 쓰지 못하고 허우적거리자 세사르가 와서 구해준다.
다이빙을 마치고 엘로이즈가 세사르에게 다이빙 레슨비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자기는 선생님이 아니라고 말한다. “손님은 다이빙 스쿨의 손님이 아니죠. 우리한테 오셨잖아요.”
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은 그들이 그녀를 좋아한다거나 그녀가 그들과 잘 맞는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들에게 왔기 때문이다. (우연히 이곳을 방문해 보살핌을 받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미국인 청년처럼. 어쩌면 잠수부들은 그 광대한 공간 속, 그런 물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그런지도 모른다.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이, 똑같이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엘로이즈는 심해 잠수를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어느 날은 혼자서 물속에서 물고기를 사냥하다가 무서워져 세사르가 있는 쪽으로 내려갔고, 두 사람은 깊은 물속에서 사랑을 나눈다.
엘로이즈는 훗날 그때 그 일을 어떤 사람 또는 성행위가 아닌, 어떤 자연적 발생이나 경미한 지진 또는 한 여름날의 일진광풍으로 기억했다.
엘로이즈가 떠나기 전날 밤. 세사르는 그녀의 숙소로 와서 그녀를 안고 잠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는 날 아침이 되자, 배를 사게 2만 페소(약 50만 원)를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이 장면에서 헉, 했다.
엘로이즈는 그들에게 온 손님이었기 때문에 레슨비도 안 받는다던 세사르가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신은 이제 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떠나는 엘로이즈를 보지도 않고 배만 살피고 있는 세사르. 그에게 엘로이즈는 미국 청년처럼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었을까. 그런 척하는 걸까. 떠나기 전날 밤 그녀의 방에 머물렀던 것은 보내고 싶지 않은 그의 아쉬움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소설은 엘로이가 떠나는 순간 산소 탱크를 점검하는 세사르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루시아 벌린의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현지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자세한 묘사, 오감을 건드리는 생생한 표현, 그리고 엘로이즈와 세사르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전달하는 비유와 신호가 인상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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