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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by 최사막 2024. 11. 23.

 

   9명의 사람들이 책방에 갇혀 글을 쓴다. 

   [사이, 책장, 엽서, 커피, 오래된 물건, 달, 포옹] 중 한 단어를 선택하여, 단어만 보고 떠오른 글을 쓴다. 

   어떤 경우엔 제시어 대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로 시작하는 글을 쓴다. 

   1,600자 이상을 써야 책방을 나갈 수 있다. 

 

   두 번째 와글와글 프로젝트로 탄생한 글을 엮은 책이다. 

 

 

   똑같이 '엽서'를 주제로 글을 쓰는데, 어떤 사람은 가족과의 행복했던 여행을 떠올리고, 어떤 글에서는 가족에게 보낸 엽서가 빨간 글씨와 함께 반송되고, 어떤 작가는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워한다. 

 

   '사이'의 해석이 다른 것도 흥미롭다. 

누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고, 한 작가는 물건과 물건의 ''이라고, 어떤 이는 '사이'코패스라고 풀어가며 글을 쓴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글의 저자를 맨 마지막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작가는 문체가 지문 수준이다.

<수취인불명> <블라우스에 커피가 쏟아진다> <달이 핀다, 달이 진다> <어둠과 살 맞대고>의 작가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마음에 오래 남은 글은 <달이 뜨는 밤에는> 

   작가가 일본 다테야마 구로베의 '눈의 대계곡'을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다.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야 하는 구로베 댐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에게 안내판을 읽어주고 있었다. 작가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높은 댐의 정상을 오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너무 위험한 건 아닌지 생각한다. 

   계단을 마저 오르다가 아찔한 높이에서 살짝 눈을 감았을 때 바람이 허공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낀 작가는 높은 곳에서 풍경을 보는 것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의 소리와 촉감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행 책자에 소개된 구로베 호수에 비친 달은 보지 못했지만, 작가는 지금도 보름달을 보면 구로베가 떠오른다고 한다.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그 순간을 추억하는 것이겠지. 

 

 

  이 책은 이런 재주가 있다. '달'과 '구로베 댐'을 연관시키는 재주.